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 걸작 <베토벤 프리즈>를 역사 속에 각인 시키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유겐트>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베토벤 프리즈>의 마지막 부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즐기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철학>, <의학>, <법학>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키스>(1907~1908),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1903년 <법학>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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